뮤지컬 배니싱 181102
전부터 보고 싶었던 배니싱을 트친님의 은혜로 이번에 보게 되었다.
2층 2열이었다. 나는 배우들의 표정이나 몸짓에 그리 집중해서 감상하는 편이 아니고 연출 보는 데에 관심이 많아서 딱 좋은 자리였다. 애초에 공짜로 받은 주제에 좋다 싫다 따질 게 어딨나. 그저 감지덕지일 뿐이지.ㅋㅋㅋ
배우들은 아래와 같았다.
이거는 무대 디자인 과정이라고 함. https://twitter.com/32scene/status/941205987142246400
무대 미술이나 연출이 두드러지는 극은 아니다. 일단 극장 자체가 크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무대도 저기서 크게 바뀐 장면이 없었다. 책상이나 침대 정도가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 정도였다. 사진에서 저기 위쪽에 창호가 찢어진 부분이 2층이다. 아래로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캐릭터가 극적으로 무대에 나타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수술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극의 배경이 경성의전이 있던 시기...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한제국~일제시대 정도의 근시대 한국이다. 그래서 한국적인 느낌보다는 앤틱한 서양식 분위기가 많이 났던 무대였다. 선반에 올려진 소품들도 앤틱 카페의 소품들 같은 느낌이었음. 무대나 소품에서 한국스러운 점은 전혀 못 느꼈다. 캐릭터들의 의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렇다면 굳이 이런 시간적 배경을 설정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개되는 걸 보니 그 시대적 배경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극이었다. 제작자가 딱 그 시기가 서양의 괴물인 뱀파이어와 한국 배경을 합치기엔 제격인 시대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한다. 의신은 뱀파이어인 케이를 보고도 '병'에 걸린 거라며, 환자니까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데, 양의학을 비롯한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라... 그런 다소 맹목적인 믿음이 가능했던 것 같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의 힘을 맹신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의신은 그 시대상을 표현하는 캐릭터다. 의학의 힘에 대한 믿음이 깊고, 아주 열정적이며 천재적이다. 그래서 케이를 연구하고 싶어하고, 덕분에 홀로 외로이 살았던 케이가 그에게 애착을 갖게 되며, 친우인 명렬의 질투의 대상이 된다. 뱀터뷰에서도 아르망이 루이에게 '너는 시대의 정신'이라는 대사를 친다. 그 당시 프랑스는 혼란스러운 시기여서 마찬가지로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루이가 닮았다고 한 이야기라 배니싱하고는 결이 다르지만, 어쨌든 루이-의신이 당시 시대상을 표현하는 캐릭터라는 것은 참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이 서사에서 의신은 루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내 예상보다도 더 뱀터뷰와 비슷한 작품이었다. 거의 한편의 오마쥬나 한국 버전 뱀터뷰 같았다.ㅋㅋ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작품이니 뱀터뷰가 언급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케이-의신의 관계가 레스타-루이처럼 어미-자식 뱀파이어 관계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설정도 뱀터뷰에서 그대로 따온 게 많다. 뱀파이어에게 물린 이는 '황홀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설정, 짐승의 피로도 연명할 수 있다는 설정, 짦게 나왔지마만 케이가 의신에게 텔레파시를 통해 말을 거는 것, 모체 뱀파이어인 케이가 아주 힘이 강하고, 뱀파이어를 만들 때에는 서로의 피를 마신다는 설정 등등. 물론 뱀터뷰가 현대적 뱀파이어물의 시초라 설정이 비슷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세부적인 설정은 얼마든지 다른데, 이 정도로 같은 걸 보니 뱀터뷰를 크게 참고했나보다.
일단 케이-의신 관계가ㅋㅋㅋㅋ 너무나 레스타-루이의 그것이라... 아 이 이야기를 하려면 스토리 설명을 해야되네. 귀찮다... 검색 한번 하면 나오는 것을... 뭐 대충 의대생 의신이 뱀파이어 케이 연구하다가 케이한테 물려서 뱀파이어가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잠적한 사이에 친우 노릇을 하던 명렬이 의신의 연구를 가로채 발표해서 명성을 얻고... 자료가 더 필요해 명렬이 의신을 찾아가 연구를 더 해달라 부탁한다. 그러다 뱀파이어 인자인 V인자를 제거하는 치료제를 발명하는데, 의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나중에 알고보니 약은 성공적이었지만 의신이 자기 몸에 너무 많은 실험을 해 먹히지 않던 거였고... 케이에게는 성공한다. 그런데 그때 명렬에게 총을 맞아서... 케이는 죽고 곁에 있던 의신도 같이 햇볕에 재가 되길 택한다는 내용이다. 내용 설명하니 약간... 뱀터뷰+지킬앤하이드+문차일드 같음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극이 워낙 배우들에 따라 캐릭터도 다른 극이라고 한다. 나는 다른 배우들 버젼을 보지 않아 차이점은 모른다. 내가 본 케이는 아주 유아적이고 미숙했다. 일단 홀로 오래 살았단 설정이라 대화부터 어색하게 하고ㅋㅋ 의신에게 쉽게 마음을 주며 강한 애착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는 레스타와 정반대인 캐릭터다. 케이는 다른 이와 햇살 아래를 걷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게 꿈이다. 그야말로 자기 파괴적인 욕구를 안고 사는 이이다. 레스타는 삶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강한 캐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는 좀 신기했다. 나는 케이가 왜 그렇게 자기 파괴적인 욕구를 안고 있으면서도 계속 살아가길 택한 건지 잘 모르겠다. 꽤 나이가 된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자기 혐오가 심하고 친한 이도 없으면 자살하지 않을까? 뱀파이어 연대기에서도 꽤 많은 뱀파이어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는데. 은연중에 같이 햇살 아래를 걸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엔딩을 보면 그 소망 때문에 죽지 않았던 게 맞지 않나 싶다.
전체적으로 깊이 있는 극은 아닌데, 특히 케이 캐릭터가 그리 깊지가 않았다. 뱀파이어는 영생을 사는 존재다. 그래서 뱀파이어물의 묘미는 각각의 뱀파이어들이 영생의 삶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고,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보는 재미라 생각한다. 뱀파연대기도 바로 그런 재미 때문에 파는 것 같다. 그런데 케이 캐릭터에서는... 케이의 삶에서는 영원히 계속되는 삶을 꾸려나가는 목적이나 방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케이는 레스타처럼 흡혈과 살인을 스스럼없이 저지른다. 그렇지만 레스타처럼 '악마'나 '반항아'를 표방하지 않는다. 흡혈이나 살인의 재미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레스타와 비슷한 대사를 치긴 한다. 악은 누가 정하냐는 요지의 대사. 그런데 케이가 살인을 저지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포식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끼리는 전쟁 등으로 서로를 엄청나게 죽였는데 자신이 죽이는 목숨은 아주 적다는 것 때문이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한 정당화로 보인다. 하지만 레스타의 그것과 비교해보았을 때, 케이의 자기합리화에는 죄책감이 짙게 남아있다. 참 수동적인 합리화다. 극중에서도 내내 정적이고 수동적이다. 케이가 능동적이었을 때는 의신을 물 때, 떠나려는 의신을 붙잡을 때 정도뿐이었다. 그런 거 보면 정말로 인간의 온기가 그리웠던 게 아닌가 싶다.
아까 유아적이라고 했는데, 진짜로 아이의 이기성을 갖고 있는 캐였다. 의신을 문 것도 그야말로 자기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고... 끝까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다. 의신을 놔두고 총을 맞아 죽다니 말이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꿈이었다고 말하다니. 남아 있는 의신을 정말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의신에게 살아남으라고 유언을 남겼을 텐데. 의신을 뱀파이어로 만든 거부터, 죽을 때까지 의신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욕심대로만 행동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아주 이기적이고 유아적이다.
보통 의신하고 케이의 관계성을 많이들 덕질하는 것 같더라. 나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둘 관계도 아주 얄팍하다고 생각했다. 사랑보다는 집착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루이-레스타는 약간 사기 당하긴 했지만ㅋㅋ 기본적으로는 루이가 레스타에게 자신을 물어달라고 부탁한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뱀터뷰 시절에도 둘 사이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었는데... 의신-케이는 그럴 건덕지가 없다. 게다가 루이는 레스타에게 물릴 당시 이미 죽을 각오였다. 의신은 삶에 대한 의지가 있던 상태에서 케이에게 물렸다. 스스로가 선택한 루이조차도 레스타를 그렇게 원망했는데... 의신에게 케이는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 같다. 엔딩이 좀... 개연성이 없다.ㅋㅋㅋㅋ 의신이 케이에게 사랑을 느낄 구석이 어디 있어. 약간 좀 스톡홀름 증후군인지...? 하여간 그래서 둘 관계가 굉장히 얄팍하게 느껴졌다.
아ㅋㅋ 의신이 인간 죽이는 거 싫어서 쥐로 연명했다길래ㅋㅋㅋㅋ 루이 생각나서 웃겼다.ㅋㅋㅋㅋ 케이는 착해서 레스타와 달리 그런 의신에게 그리 화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놈은 이미 의신 납치한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화낼 일이 없었겠네.ㅋㅋㅋㅋ
뭐... 대사 세세한 부분에서 의신과 케이의 더 깊은 관계가 드러났을 수도 있겠다. 내가 대사 하나하나를 자세히 듣는 편이 아니라 잘 모르겠음.ㅋㅋ
말했다시피 의신은 루이와 달리 원치 않았던 영생의 삶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철저히 망가진다. 여기서 제일 큰 연기폭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음... 나는 명렬보다는 의신의 캐릭터 변화가 더 극적이라 느꼈다.) 뱀파이어가 된 이후로 그야말로 폐인처럼 지내다가, 명렬에게 연구를 부탁 받은 이후로 거기에만 매달린다. 의학의 힘을 굳게 믿던 캐릭터가,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해 망가지고 또 다시 한번 의학 연구로 삶의 목적을 되찾는 게 흥미로웠다. 결국은 바로 그 의학 연구로 '뱀파이어'를 치료했다는 결말이 재밌다.
폐인이 되었을 때는 클라우디아 이전의 루이가 연상되었다. 루이 또한 뱀파이어의 삶에 환멸을 느끼다, 클라우디아라는 목적을 얻게 되는데 의신에게는 '클라우디아'가 의학이었다. 다른 말로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 정말로 근대스러운 극이다.ㅋㅋ 한... 데카르트 시대 정도의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환장했을 것 같다.ㅋㅋ
케이는 레스타 포지션이었지만 이기적인 거랑 유아적인 점을 보니 아르망을 닮은 것 같다.ㅋㅋ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이 뱀파이어인 걸 부정하는 의신에게 '너는 괴물이다'고 소리 지르는 포지션은 오히려 명렬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레스타를 닮은 캐는 명렬이 아닐까 한다. 물론 레스타라기엔 너무 비열하지만 말이다.ㅋㅋ
캐릭터나 스토리에 대한 감상은 이 정도. 확실히 촘촘한 서사는 아니다. 캐릭터나 관계성도 빈약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덕질하고 싶어지는 극인 것 같다.ㅎㅎ 원래 원작의 공백을 채워가며 하는 덕질이 재밌는 법이지.
노래는 내가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음. 그냥 다들 잘 했다. 명렬은 성악가 같았고 엄청 시원하게 노래를 했다. 의신은 약간 특이한 음색이었는데, 나는 이걸 굴곡있는 목소리라고 표현한다. 케이는 가성을 잘 쓰는... 왠지 안개가 연상되는 음색이었다. 딱히 목소리의 조화나 이런 거도 모르겠다. 심지어 내가 가사를 잘 못알아듣는 인간이라 뭐라 부르는지 놓친 부분도 많다.
다시 무대 이야기를 해보자면, 대개 창과 문(무대 양 옆)을 이용한 빛 연출이 많았다. 뱀파이어에게 빛을 비추는 장면이 특히 중요하게 등장해서 더 그랬다. 보고 나니 전체적으로 창문 가득한 벽을 배경으로 삼은 게 참 상징적이고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열린 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을 케이가 피하는 장면이나, 명렬이 창문을 하나하나씩 젖히며 의신을 위협하는 장면 등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극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이런 연출이 많다. 정말 햇살 같은 노란 빛이 직선으로 무대에 들어오는 게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명렬이 위협하는 장면에는 무대 옆쪽에서 빛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무대 뒤쪽의 벽에서 빛이 하나 하나씩 들어왔다. 사진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벽이 가장자리에서 살짝 안쪽으로 꺾여있다. 그래서 각도를 달리하며 무대 바닥에 창 그림자가 아로새겨지고 서로 겹쳐졌다. 창무늬가 겹쳐진 모습이 예뻤다. 성당이 연상 되기도 했다.
어떤 뮤지컬/연극이든 연출이 가장 극적인 클라이맥스 부분이 있다. 배니싱에서는 케이가 의신을 무는 장면이었다. 이때 전체적으로 붉은 조명에 엉킨 덤불 같은... 조명 그림자가 바닥 중앙에 그려지다가 의신이 완전히 의식을 잃는 장면에서 그 붉은 조명이 벽과 바닥, 무대 전체로 확 퍼진다. 조명으로 무대 전체를 비추는 연출은 그게 유일했다. 그래서 더 극적인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그 장면 이후로 의신이 뱀파이어로 지낼 때 계속 그 덤불 조명이 바닥 중앙에 계속 비춰진다. 그게 약간 악마의 문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뱀파이어물 치고는 의외로 붉은 조명이 많이 나오는 극은 아니었는데ㅋㅋ 뱀파이어가 되는 장면과 그 이후로 뱀파이어의 본능과 싸우는 장면에서 붉은 조명을 써서 상징적이고 인상깊게 느껴졌다. 특별히 무대가 두드러지는 극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대가 아가자기하게 예뻐서 보는 맛이 없진 않았다.
후기는 이 정도다. 기대보다 재밌고 흥미로웠고, 다른 배우의 캐릭터가 어떤지 궁금해서 다른 회차 살짝 관심가기도 한다. 그런데 연기나 노래보다는 연출과 캐릭터에 집중하는 편이라 한번 더 보면 재미 없을 것 같다. 한번 더 본다고 캐릭터나 관계성이 더 이해갈 것 같지도 않고ㅋㅋ 약간 아쉬운 여운을 갖고 배니싱은 자첫으로 끝내야겠다. 다시 한번 재밌는 극을 보게 해주신 트친님께 감사한 맘을 가지며... 후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