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름답다.
가느다란 체형, 하얀 피부, 크고 깨끗한 눈, 얼굴 중심에서 매끄럽게 솟은 코, 보기 좋은 선을 그리는 입술, 날렵하게 빠진 턱. 세상은 그런 외모를 지닌 너를 아름답다고 했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길가에 핀 하찮은 꽃 하나에도 마음을 빼앗기는 게 인간이지 않나. 너는 꽃 같은 존재였다. 네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너를 돌아보고, 감탄하고, 욕망하고는 했다. 오늘 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애, 엄청 잘생겼더라. 걔는 정말 여자처럼 예쁘던데. 당연히 애인 있겠지? 어느 모임에 처음 나온 너를 두고 사람들은 한참을 떠들었다. 더러는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더러는 호들갑 떨지 말라며 너를 깎아내리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게 생소할 따름이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멍청했으니까. 그들에게 멍하니 물었을 뿐이다. 걔가 누군데?
너와의 기억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한껏 너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바보같이 그 대화에 끼지 못하던 나. 그때 나는 어떻게 ‘그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냐며 쏟아지는 질타를 머쓱하게 웃어넘겼더란다. 그깟 껍데기가 뭐 어떻다고. 네가 얽힌 첫 기억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아, 차라리 흔해빠진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너에게 나는 첫눈에 반하고,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꿈결 같은 연애를 한동안 이어가고, 그러다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고. 널리고 널린 연애담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수도 없이 되씹었던 소망이 다시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와는 달랐다. 아름다운 너에게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너는 혼자 사랑에 빠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고, 그저 그런 연애를 이어갔고, 결국 나는 널 버렸다. 돌이켜보면 후회뿐인 만남이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이제는 의미 없는 물음.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본다. 어떤 의미로 우리의 연애는 꿈결 같았다. 꿈속에서 온갖 모험을, 고초를 겪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무서워하다가도 깨어나는 순간 그 기억은 덧없이 스러지는 것처럼 너와의 시간도 그랬다. 너와 한 수많은 데이트와 키스와 섹스와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던 일상 이야기와 함께 주고받은 과거와 미래는 허공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손에 가득 쥔 고운 모래알처럼 너는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쏟아져 버렸다. 내 손에 들러붙어 미처 떨어지지 못한 기억 몇 알을 바라본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우리는.
그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잘생긴 아이. 뒤에서 모두의 시선을 끌었던 애.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귀는 주인만큼이나 둔해서 그 이야기를 주워 담았을 무렵에는 소문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나는 내가 주인공인 소문을 들으면서도 실없는 생각만을 했다.너는 참 힘들겠구나. 사람들이 네게 이렇게나 관심이 많아서.
그리고 또 너와 마주쳤다. 너는 처음 만났을 때나 그때나 정말 인상이 흐릿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토록 관심의 중심이 되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이 마주쳐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너는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이 달싹였고, 눈꺼풀이 고장 난 조명처럼 자꾸 깜빡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넌 정말로 내가 좋은가 보구나. 너를 욕망하는 수많은 이들을 앞에 두고 하필 네게 관심도 없던 날 좋아하게 됐구나. 네 눈동자는 갖은 감정이 뒤섞여 까맸다. 조용히 동요하는 그 까만 눈을 마주하고 나는 조금 측은해졌다. 동정이었다. 모두에게 독이 될 아주 알량한 동정심.
말했던가? 나는 멍청했다고. 그 싸구려 동정을 애정으로 착각할 만큼 바보였다고. 나와 마주칠 때면 가늘게 떨면서도 애써 보이는 미소가 신경 쓰였다. 원하지도 않는 관심에 시달리는 네가 신경 쓰였다. 잘생긴 얼굴 뒤에 숨겨 놓은 까만 감정이 신경 쓰였다. 저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는데 한번은 받아주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신경 쓰였다. 네 언행 전부가 신경 쓰였다. 감쪽같은 착각이었다. 나도 너처럼 사랑에 빠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너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연애였다. 내 앞에서의 너는 재미없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데이트에서 너는 곧잘 웃었고, 어린 애처럼 신나게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했다. 뜨겁게 혀를 얽어왔으며, 시시콜콜하게 일상을 늘어놓았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네 빛이 되었고, 나를 받은 너는 별처럼 반짝였다. 네 눈에 담겨있던 물감 같은 검은 감정은 어느 새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네가 환히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값싼 동정심에서 비롯된 값싼 호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쭐해졌다.외사랑에 떨던 너를 구원해줬고 달콤한 연애를 선사했다는 착각에 취했다. 다른 사람들마저도 나를 칭찬했다. 애인이 참 예쁘다고, 너는 정말 운이 좋다고. 아름다운 건 너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나를 향한 찬사였다.너는 여전히 꽃과 다름없었다. 지나가다 눈길이 꽂히면 감탄이나 내뱉고는 하는. 꺾은 사람을 부러워하기나 하는.
내가 착각 속에 계속 빠져있었다면 우리도 흔한 연인들처럼 한참을 사귀다 사소한 계기로 헤어졌을까. 그놈 진짜 나쁜 놈이었다며 술안주로 씹다가 서서히 서로를 잊어갔을까. 그러나 착각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손쓸 도리도 없이, 귀가 찢어지는 소음을 내며 나를 깨웠다.
아, 여기는 조금 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날 깨운 건 다름 아닌 내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심장을 뛰게 하고 잠 못 들게 한 첫사랑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내 오랜 소꿉친구였다. 까마득한 오랜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고 그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를 때부터 마음에 품은 이였다.
재회는 뜻밖의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 등굣길에서 헤어진 친구들처럼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섞였다. 잘 지냈냐? 연애한다며. 시답지 않은 근황을 나누며 킬킬거렸다.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와 다시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첫사랑 앞에서 소년마냥 얼굴을 붉혔고, 안절부절못했고, 멍하니 그를 향한 생각에 잠기곤 했으며,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일이 많아졌다. 그와 눈을 맞추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부를 맞대고, 그를 온통 내 것으로 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나는 진실로 이기적인 인간인가보다. 그 시절의 기억은 전부 그로 가득 차 있다. 네 기억은 그야말로 모래처럼 흩어져 어디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네게 소홀해졌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돌아온 사랑 때문에 열병을 앓다가 한참 뒤에나 옆에 있는 네가 보였다. 너는 언제나 다름없이 차분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웃지 않았고, 말수가 적어졌고, 내게 피부를 맞대오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네 눈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까만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게 너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삼켜버릴까 봐 두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좌절했다. 네게서 다시 웃음을 빼앗은 이가 나라서.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린 게 바로 나라서. 나는 네 빛이 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네 아픔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었다.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별이 갑자기 사라진 밤하늘이 더욱더 어두워 보이는 것과 같이 너는 더 진한 어둠에 묻혔다.
알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조차도 다른 곳에서 비롯된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너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때쯤에는 마음의 위장을 알아차렸기도 했다. 너는 내게 만족을 줄지언정 내 심장은 뛰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와의 시간은 순식간에 색이 바랬다.
이별을 고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되뇌었다. 그런데 막상 널 보니 그 말이 입에서 뚝 떨어져 나오더라. 조금 야윈 네 얼굴이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바보처럼 나는 또 측은해졌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너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우리 둘 다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러다 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왜 나랑 사귀었어?”
뭐라 답하면 좋을까. 네가 불쌍해서? 늘 불행해 보이는 네가 나와 있을 때는 행복해 보여서? 같잖은 동정심을 사랑이라 착각해서? 도무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해 봐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결국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어.”
너에게선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잃은 너를 보곤, 절망이 잔뜩 번진 네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면목 없이 덧붙였다.
“미안해.”
차라리 너는 나란 존재를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우리는 서로를 영영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네 마음에 담겨서 미안해. 널 받아줘서 미안해. 결국은 이렇게 버려서 미안해. 네게 어떤 위안도 되지 못해 미안해. 줄줄이 고백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맥락 없이 뚝 떨어진 그 한 마디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길고도 짧았던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너와의 끝은 곧 그와의 시작이었다. 혹자는 비정하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차 없이 사람을 걷어차 놓고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냐며. 그렇지만 나는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너에 대한 후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너를 향한 깊은 죄책감을 잊기 위해서. 새로운 시작은 내 발버둥의 일환이었다.
새 사랑이 으레 그렇듯이 처음 몇 달간은 그저 행복했다. 함께 보냈던 세월이 긴 만큼 우리는 꼭 맞아떨어졌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터질 듯이 방망이질 쳤고, 얼굴만 보아도 설렜다. 그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 존재는 두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내게서 빠져나갔다. 그의 옆에서 행복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로 생각했다. 이런 게 연애구나. 너와 했던 건 그야말로 장난일 뿐이었구나.
하지만 첫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가장 순수한 때에 한 사랑이라서 쉽게 빠져들지만, 그래서 세상의 때가 묻는 그 순간부터 어긋난다고. 그와의 연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인지 지금 떠올려 보아도 잘 모르겠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나는 둔한 사람이니 그가 보내는 불편의 신호를 잡아내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그는 내게서 멀어졌다. 함께 있어도 생각에 잠기고 종종 얕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어쩌면 너무 빈틈없이 꼭 맞아떨어지던 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 너무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신선함도, 설렘도 전부 말라버렸다는 것. 뭐, 애정이 식는 데에 특별히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타오르는 것은 언젠가 사그라지기 마련이니까. 그와 나는 끝없는 권태에 빠졌다.
그즈음 너와 다시 마주했다. 완전한 우연이었다. 나는 벌써 까마득한 기억처럼 느껴지는 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첫 만남의, 아니 첫 깨달음의 순간처럼 너는 나를 돌아보았고 우리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닿았다.안녕, 이번에 먼저 인사를 건넨 쪽은 너였다. 너는 조금 달라 보였다. 입술을 달싹이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눈꺼풀을 고장 난 조명처럼 깜빡이지도 않았다.
“…좋아 보인다.”
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가 살짝 끌어 당겨져 호선을 그렸다. 커다랗고 맑은 눈이 가볍게 접혔다. 나는 말을 잃었다. 네가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짧디짧은 만남 속에서 네가 마음에 강하게 새겨졌다. 나는 머리를 맞은 듯 얼이 빠졌다. 무어라 대꾸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좋아 보이는 건 너라고, 이제는 그 누구의 동정도 필요치 않을 것 같다고, 너 정말 달라졌다고 진심을 뱉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바보처럼 네게 압도되어 너를 시선으로 열심히 좇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네 생각이 났다. 내 얼굴을 보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던 너. 유유히 미소 짓던 너. 과거와는 달리 조금도 불안해 보이지 않던 너. 널 온통 삼켜버릴 것 같던 검은 감정을 온데간데없이 씻어 내린 너. 나는 왜 네게 그렇게나 시선을 사로잡힌 걸까.
나는 멍청하고 이기적이었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이에게 그리 애정을 주기 쉬울 줄 몰랐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끄러지듯이 네게 빠지고야 말았다.
당연하게도,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날 좋아해 어쩔 줄 모르던 너를 가차 없이 걷어찬 인간이었다. 거기다 첫사랑과 사귀는 중이었다. 네 생각에 빠진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내가 아껴 마지않는 첫사랑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원하는 대로 통제되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은 나를 비웃으며 내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너를 곱씹었다. 너는 왜 아름다워졌을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멍청하고 후회로만 가득 차 있는데. 첫사랑을 앞에 두고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방황하고 있는데. 연애와 실연은 사람을 바꾼다고들 하지만 나만은 예외인 것 같았다. 너와의 시간도 찬찬히 되새김질했다. 회상 속에서야 비로소 내 옆에 있던 너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몸집과는 달리 강단 있던 너. 너와 같이 있을 때면 공유하게 되는 차분한 공기. 내가 기타를 튕길 때면 가만히 있다가 멜로디를 같이 흥얼거리던 너. 네 입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던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을 뒤늦게 그리워하게 되었다. 내 회상 속에서 너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우습게도 너를 욕망하던 수많은 이들처럼, 너를 원하게 되었다.
네 생각이 유령처럼 떠나지 않았다.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불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를 불러냈다. 뜻밖에도 너는 내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 내가 너무 절박해 보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 기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껏 사람을 앞에 불러놓고도 우물쭈물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너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결국 난 토하듯이 목 끝까지 올라와 있던 후회를 뱉었다.
네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냈을지도 모르는 내용의 고백에도 너는 잠자코 있었다. 쏟아질 화가 두려워 떨다가 내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든 순간, 네가 작게 웃었다. 침묵 사이를 가로지르는 웃음은 산뜻한 감탄 같기도 했고 차가운 비웃음 같기도 했다.
“아니야.”
나직한 웃음이 지나가고 네가 입에 올린 것은 부정의 한 마디였다.
“넌 날 좋아하지 않아.”
“…….”
“단 한 순간도 좋아한 적 없어.”
멍하니 네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분노도 슬픔도 네게선 보이지 않았다.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네 생각들은 뭔데? 이 그리움은 어디서 비롯된 건데?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드문드문 의문이 치솟았다. 하지만 조용히 네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단호한 부정에 한 치의 틈도 없어서였을까. 내 마음 한쪽은 의문으로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다른 한쪽은 원하는 답을 찾은 듯 고요히 가라앉았다.
우리는 또 한참을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주위의 소음은 어느 새부터 들리지 않았고 그 공간에서 너와 나만이 마주하고 있었다. 너는 생각에 빠진 듯 한동안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나를 보았다.
“지금 네 애인, 좋은 애 같더라.”
그 말을 듣는데 왠지 마음이 아려왔다. 나는 기어코 네가 이런 말까지 하게 하는 못난 사람이구나. 너는 정말 단단해졌구나. 그런 자기혐오와 부러움이 한 데 뒤섞여 가슴 한구석이 쥐어짜듯이 아팠다. 차오르는 눈물에 당황한 나는 일부러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이 네게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너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시종일관 네 표정은 읽기 힘들었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그 웃음에 나를 향한 작은 위로와 동정이 담겨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는 다신 만나지 말자.”
그게 너와의 마지막이었다. 진짜 마지막. 바보처럼 질질 짜고 있는 나를 두고 일어나 떠나는 네가 흐린 시야로 보였다. 네 뒷모습을 보고 알아챘다. 너는 비로소 한 명의 인간처럼 보였다. 아니, 인간이었다. 길가에 외로이 피어서 사람들이 감탄이나 내뱉고 가는, 꺾어가고 싶어 하는 꽃이 아니라.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다시는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내가 널 불러내는 일도, 주위 사람들에게서 네 소식을 전해 듣는 일도 없었다. 신기할 노릇이었다. 한 존재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내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지금 돌이켜보면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있기나 했던 걸까 싶다. 어쩌면 이건 전부 내 꿈이 아닐까.
나는 그 길로 내 연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또 바보처럼 사과와 후회를 뱉었다. 다시 마음이 가서 그를 만났어. 미안해. 그는 네 말대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한심할 정도로 꾸밈없는 자백조차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 어떻게 내 곁에는 이다지도 과분한 사람들만 있는지 모르겠다. 그게 전부였다. 다시는 네 이야기를 입에 올릴 일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 후로 내가 첫사랑과 겪고 있던 권태는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빈틈없이 꼭 맞아떨어지는 기분을 즐기게 되었고, 다시 행복해졌다.
그 속에서 너와 보낸 시간은 덧없이 스러졌다. 손에 쥔 고운 모래알마냥 스르르 빠져나가 버렸다. 쏟아진 네 흔적 위로 시간이 켜켜이 덮였다.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내 손바닥에 달라붙어 미처 떨어지지 못한 몇몇 감정뿐이다. 너는 그렇게 추억이 되었다.
그래도 가끔 홀연히 네가 떠오르고는 한다. 신기루처럼 아주 홀연히.네 가느다란 체형, 크고 깨끗한 눈, 얼굴 중심에서 매끄럽게 솟은 코, 보기 좋은 선을 그리는 입술, 날렵하게 빠진 턱 따위가 머릿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와 둥둥 맴돈다. 너를 떠올리면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여전히 너를 향한 세상의 감탄을, 욕망을, 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느다란 체형, 하얀 피부, 크고 깨끗한 눈, 얼굴 중심에서 매끄럽게 솟은 코, 보기 좋은 선을 그리는 입술, 날렵하게 빠진 턱. 세상은 그런 외모를 지닌 너를 아름답다고 했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길가에 핀 하찮은 꽃 하나에도 마음을 빼앗기는 게 인간이지 않나. 너는 꽃 같은 존재였다. 네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너를 돌아보고, 감탄하고, 욕망하고는 했다. 오늘 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애, 엄청 잘생겼더라. 걔는 정말 여자처럼 예쁘던데. 당연히 애인 있겠지? 어느 모임에 처음 나온 너를 두고 사람들은 한참을 떠들었다. 더러는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더러는 호들갑 떨지 말라며 너를 깎아내리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게 생소할 따름이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멍청했으니까. 그들에게 멍하니 물었을 뿐이다. 걔가 누군데?
너와의 기억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한껏 너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바보같이 그 대화에 끼지 못하던 나. 그때 나는 어떻게 ‘그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냐며 쏟아지는 질타를 머쓱하게 웃어넘겼더란다. 그깟 껍데기가 뭐 어떻다고. 네가 얽힌 첫 기억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아, 차라리 흔해빠진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너에게 나는 첫눈에 반하고,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꿈결 같은 연애를 한동안 이어가고, 그러다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고. 널리고 널린 연애담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수도 없이 되씹었던 소망이 다시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와는 달랐다. 아름다운 너에게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너는 혼자 사랑에 빠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고, 그저 그런 연애를 이어갔고, 결국 나는 널 버렸다. 돌이켜보면 후회뿐인 만남이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이제는 의미 없는 물음.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본다. 어떤 의미로 우리의 연애는 꿈결 같았다. 꿈속에서 온갖 모험을, 고초를 겪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무서워하다가도 깨어나는 순간 그 기억은 덧없이 스러지는 것처럼 너와의 시간도 그랬다. 너와 한 수많은 데이트와 키스와 섹스와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던 일상 이야기와 함께 주고받은 과거와 미래는 허공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손에 가득 쥔 고운 모래알처럼 너는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쏟아져 버렸다. 내 손에 들러붙어 미처 떨어지지 못한 기억 몇 알을 바라본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우리는.
그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잘생긴 아이. 뒤에서 모두의 시선을 끌었던 애.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귀는 주인만큼이나 둔해서 그 이야기를 주워 담았을 무렵에는 소문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나는 내가 주인공인 소문을 들으면서도 실없는 생각만을 했다.너는 참 힘들겠구나. 사람들이 네게 이렇게나 관심이 많아서.
그리고 또 너와 마주쳤다. 너는 처음 만났을 때나 그때나 정말 인상이 흐릿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토록 관심의 중심이 되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이 마주쳐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너는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이 달싹였고, 눈꺼풀이 고장 난 조명처럼 자꾸 깜빡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넌 정말로 내가 좋은가 보구나. 너를 욕망하는 수많은 이들을 앞에 두고 하필 네게 관심도 없던 날 좋아하게 됐구나. 네 눈동자는 갖은 감정이 뒤섞여 까맸다. 조용히 동요하는 그 까만 눈을 마주하고 나는 조금 측은해졌다. 동정이었다. 모두에게 독이 될 아주 알량한 동정심.
말했던가? 나는 멍청했다고. 그 싸구려 동정을 애정으로 착각할 만큼 바보였다고. 나와 마주칠 때면 가늘게 떨면서도 애써 보이는 미소가 신경 쓰였다. 원하지도 않는 관심에 시달리는 네가 신경 쓰였다. 잘생긴 얼굴 뒤에 숨겨 놓은 까만 감정이 신경 쓰였다. 저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는데 한번은 받아주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신경 쓰였다. 네 언행 전부가 신경 쓰였다. 감쪽같은 착각이었다. 나도 너처럼 사랑에 빠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너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연애였다. 내 앞에서의 너는 재미없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데이트에서 너는 곧잘 웃었고, 어린 애처럼 신나게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했다. 뜨겁게 혀를 얽어왔으며, 시시콜콜하게 일상을 늘어놓았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네 빛이 되었고, 나를 받은 너는 별처럼 반짝였다. 네 눈에 담겨있던 물감 같은 검은 감정은 어느 새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네가 환히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값싼 동정심에서 비롯된 값싼 호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쭐해졌다.외사랑에 떨던 너를 구원해줬고 달콤한 연애를 선사했다는 착각에 취했다. 다른 사람들마저도 나를 칭찬했다. 애인이 참 예쁘다고, 너는 정말 운이 좋다고. 아름다운 건 너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나를 향한 찬사였다.너는 여전히 꽃과 다름없었다. 지나가다 눈길이 꽂히면 감탄이나 내뱉고는 하는. 꺾은 사람을 부러워하기나 하는.
내가 착각 속에 계속 빠져있었다면 우리도 흔한 연인들처럼 한참을 사귀다 사소한 계기로 헤어졌을까. 그놈 진짜 나쁜 놈이었다며 술안주로 씹다가 서서히 서로를 잊어갔을까. 그러나 착각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손쓸 도리도 없이, 귀가 찢어지는 소음을 내며 나를 깨웠다.
아, 여기는 조금 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날 깨운 건 다름 아닌 내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심장을 뛰게 하고 잠 못 들게 한 첫사랑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내 오랜 소꿉친구였다. 까마득한 오랜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고 그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를 때부터 마음에 품은 이였다.
재회는 뜻밖의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 등굣길에서 헤어진 친구들처럼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섞였다. 잘 지냈냐? 연애한다며. 시답지 않은 근황을 나누며 킬킬거렸다.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와 다시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첫사랑 앞에서 소년마냥 얼굴을 붉혔고, 안절부절못했고, 멍하니 그를 향한 생각에 잠기곤 했으며,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일이 많아졌다. 그와 눈을 맞추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부를 맞대고, 그를 온통 내 것으로 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나는 진실로 이기적인 인간인가보다. 그 시절의 기억은 전부 그로 가득 차 있다. 네 기억은 그야말로 모래처럼 흩어져 어디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네게 소홀해졌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돌아온 사랑 때문에 열병을 앓다가 한참 뒤에나 옆에 있는 네가 보였다. 너는 언제나 다름없이 차분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웃지 않았고, 말수가 적어졌고, 내게 피부를 맞대오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네 눈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까만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게 너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삼켜버릴까 봐 두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좌절했다. 네게서 다시 웃음을 빼앗은 이가 나라서.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린 게 바로 나라서. 나는 네 빛이 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네 아픔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었다.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별이 갑자기 사라진 밤하늘이 더욱더 어두워 보이는 것과 같이 너는 더 진한 어둠에 묻혔다.
알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조차도 다른 곳에서 비롯된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너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때쯤에는 마음의 위장을 알아차렸기도 했다. 너는 내게 만족을 줄지언정 내 심장은 뛰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와의 시간은 순식간에 색이 바랬다.
이별을 고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되뇌었다. 그런데 막상 널 보니 그 말이 입에서 뚝 떨어져 나오더라. 조금 야윈 네 얼굴이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바보처럼 나는 또 측은해졌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너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우리 둘 다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러다 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왜 나랑 사귀었어?”
뭐라 답하면 좋을까. 네가 불쌍해서? 늘 불행해 보이는 네가 나와 있을 때는 행복해 보여서? 같잖은 동정심을 사랑이라 착각해서? 도무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해 봐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결국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어.”
너에게선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잃은 너를 보곤, 절망이 잔뜩 번진 네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면목 없이 덧붙였다.
“미안해.”
차라리 너는 나란 존재를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우리는 서로를 영영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네 마음에 담겨서 미안해. 널 받아줘서 미안해. 결국은 이렇게 버려서 미안해. 네게 어떤 위안도 되지 못해 미안해. 줄줄이 고백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맥락 없이 뚝 떨어진 그 한 마디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길고도 짧았던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너와의 끝은 곧 그와의 시작이었다. 혹자는 비정하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차 없이 사람을 걷어차 놓고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냐며. 그렇지만 나는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너에 대한 후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너를 향한 깊은 죄책감을 잊기 위해서. 새로운 시작은 내 발버둥의 일환이었다.
새 사랑이 으레 그렇듯이 처음 몇 달간은 그저 행복했다. 함께 보냈던 세월이 긴 만큼 우리는 꼭 맞아떨어졌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터질 듯이 방망이질 쳤고, 얼굴만 보아도 설렜다. 그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 존재는 두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내게서 빠져나갔다. 그의 옆에서 행복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로 생각했다. 이런 게 연애구나. 너와 했던 건 그야말로 장난일 뿐이었구나.
하지만 첫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가장 순수한 때에 한 사랑이라서 쉽게 빠져들지만, 그래서 세상의 때가 묻는 그 순간부터 어긋난다고. 그와의 연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인지 지금 떠올려 보아도 잘 모르겠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나는 둔한 사람이니 그가 보내는 불편의 신호를 잡아내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그는 내게서 멀어졌다. 함께 있어도 생각에 잠기고 종종 얕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어쩌면 너무 빈틈없이 꼭 맞아떨어지던 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 너무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신선함도, 설렘도 전부 말라버렸다는 것. 뭐, 애정이 식는 데에 특별히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타오르는 것은 언젠가 사그라지기 마련이니까. 그와 나는 끝없는 권태에 빠졌다.
그즈음 너와 다시 마주했다. 완전한 우연이었다. 나는 벌써 까마득한 기억처럼 느껴지는 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첫 만남의, 아니 첫 깨달음의 순간처럼 너는 나를 돌아보았고 우리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닿았다.안녕, 이번에 먼저 인사를 건넨 쪽은 너였다. 너는 조금 달라 보였다. 입술을 달싹이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눈꺼풀을 고장 난 조명처럼 깜빡이지도 않았다.
“…좋아 보인다.”
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가 살짝 끌어 당겨져 호선을 그렸다. 커다랗고 맑은 눈이 가볍게 접혔다. 나는 말을 잃었다. 네가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짧디짧은 만남 속에서 네가 마음에 강하게 새겨졌다. 나는 머리를 맞은 듯 얼이 빠졌다. 무어라 대꾸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좋아 보이는 건 너라고, 이제는 그 누구의 동정도 필요치 않을 것 같다고, 너 정말 달라졌다고 진심을 뱉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바보처럼 네게 압도되어 너를 시선으로 열심히 좇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네 생각이 났다. 내 얼굴을 보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던 너. 유유히 미소 짓던 너. 과거와는 달리 조금도 불안해 보이지 않던 너. 널 온통 삼켜버릴 것 같던 검은 감정을 온데간데없이 씻어 내린 너. 나는 왜 네게 그렇게나 시선을 사로잡힌 걸까.
나는 멍청하고 이기적이었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이에게 그리 애정을 주기 쉬울 줄 몰랐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끄러지듯이 네게 빠지고야 말았다.
당연하게도,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날 좋아해 어쩔 줄 모르던 너를 가차 없이 걷어찬 인간이었다. 거기다 첫사랑과 사귀는 중이었다. 네 생각에 빠진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내가 아껴 마지않는 첫사랑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원하는 대로 통제되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은 나를 비웃으며 내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너를 곱씹었다. 너는 왜 아름다워졌을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멍청하고 후회로만 가득 차 있는데. 첫사랑을 앞에 두고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방황하고 있는데. 연애와 실연은 사람을 바꾼다고들 하지만 나만은 예외인 것 같았다. 너와의 시간도 찬찬히 되새김질했다. 회상 속에서야 비로소 내 옆에 있던 너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몸집과는 달리 강단 있던 너. 너와 같이 있을 때면 공유하게 되는 차분한 공기. 내가 기타를 튕길 때면 가만히 있다가 멜로디를 같이 흥얼거리던 너. 네 입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던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을 뒤늦게 그리워하게 되었다. 내 회상 속에서 너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우습게도 너를 욕망하던 수많은 이들처럼, 너를 원하게 되었다.
네 생각이 유령처럼 떠나지 않았다.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불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를 불러냈다. 뜻밖에도 너는 내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 내가 너무 절박해 보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 기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껏 사람을 앞에 불러놓고도 우물쭈물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너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결국 난 토하듯이 목 끝까지 올라와 있던 후회를 뱉었다.
네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냈을지도 모르는 내용의 고백에도 너는 잠자코 있었다. 쏟아질 화가 두려워 떨다가 내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든 순간, 네가 작게 웃었다. 침묵 사이를 가로지르는 웃음은 산뜻한 감탄 같기도 했고 차가운 비웃음 같기도 했다.
“아니야.”
나직한 웃음이 지나가고 네가 입에 올린 것은 부정의 한 마디였다.
“넌 날 좋아하지 않아.”
“…….”
“단 한 순간도 좋아한 적 없어.”
멍하니 네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분노도 슬픔도 네게선 보이지 않았다.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네 생각들은 뭔데? 이 그리움은 어디서 비롯된 건데?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드문드문 의문이 치솟았다. 하지만 조용히 네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단호한 부정에 한 치의 틈도 없어서였을까. 내 마음 한쪽은 의문으로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다른 한쪽은 원하는 답을 찾은 듯 고요히 가라앉았다.
우리는 또 한참을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주위의 소음은 어느 새부터 들리지 않았고 그 공간에서 너와 나만이 마주하고 있었다. 너는 생각에 빠진 듯 한동안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나를 보았다.
“지금 네 애인, 좋은 애 같더라.”
그 말을 듣는데 왠지 마음이 아려왔다. 나는 기어코 네가 이런 말까지 하게 하는 못난 사람이구나. 너는 정말 단단해졌구나. 그런 자기혐오와 부러움이 한 데 뒤섞여 가슴 한구석이 쥐어짜듯이 아팠다. 차오르는 눈물에 당황한 나는 일부러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이 네게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너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시종일관 네 표정은 읽기 힘들었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그 웃음에 나를 향한 작은 위로와 동정이 담겨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는 다신 만나지 말자.”
그게 너와의 마지막이었다. 진짜 마지막. 바보처럼 질질 짜고 있는 나를 두고 일어나 떠나는 네가 흐린 시야로 보였다. 네 뒷모습을 보고 알아챘다. 너는 비로소 한 명의 인간처럼 보였다. 아니, 인간이었다. 길가에 외로이 피어서 사람들이 감탄이나 내뱉고 가는, 꺾어가고 싶어 하는 꽃이 아니라.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다시는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내가 널 불러내는 일도, 주위 사람들에게서 네 소식을 전해 듣는 일도 없었다. 신기할 노릇이었다. 한 존재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내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지금 돌이켜보면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있기나 했던 걸까 싶다. 어쩌면 이건 전부 내 꿈이 아닐까.
나는 그 길로 내 연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또 바보처럼 사과와 후회를 뱉었다. 다시 마음이 가서 그를 만났어. 미안해. 그는 네 말대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한심할 정도로 꾸밈없는 자백조차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 어떻게 내 곁에는 이다지도 과분한 사람들만 있는지 모르겠다. 그게 전부였다. 다시는 네 이야기를 입에 올릴 일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 후로 내가 첫사랑과 겪고 있던 권태는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빈틈없이 꼭 맞아떨어지는 기분을 즐기게 되었고, 다시 행복해졌다.
그 속에서 너와 보낸 시간은 덧없이 스러졌다. 손에 쥔 고운 모래알마냥 스르르 빠져나가 버렸다. 쏟아진 네 흔적 위로 시간이 켜켜이 덮였다.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내 손바닥에 달라붙어 미처 떨어지지 못한 몇몇 감정뿐이다. 너는 그렇게 추억이 되었다.
그래도 가끔 홀연히 네가 떠오르고는 한다. 신기루처럼 아주 홀연히.네 가느다란 체형, 크고 깨끗한 눈, 얼굴 중심에서 매끄럽게 솟은 코, 보기 좋은 선을 그리는 입술, 날렵하게 빠진 턱 따위가 머릿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와 둥둥 맴돈다. 너를 떠올리면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여전히 너를 향한 세상의 감탄을, 욕망을, 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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